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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하경

Day+1 Plato “Arete”

오늘의 철학자: 플라톤 (고대철학자)
플라톤의 ‘아레테(arete)’ 그리스인들에게 아레테는 탁월성이 최고로 발현된 상태라고 한다. 아레테는 마치 꽃이 활짝 피었를 때, 과일이 무르익었을 때와 같다.
인간의 삶에도 아레테가 있다. 플라톤은 인간이 아레테를 추구해야한다고 했다.
가장 좋은 삶이란 잠재력이 발현되어 최고의 능력을 발휘하는 삶이다.
오늘 나의 중심 하나: 늘 아레테를 추구하며 살아갈 것

Day+2 Epikouros “Ataraxia”

오늘의 철학자: 에피쿠로스 (고대철학자)
에피쿠로스의 ‘아타락시아(ataraxia)’ 에피쿠로스는 삶의 목적을 쾌락이라고 했다. 쾌락이라는 단어는 오해를 살 수 있는 단어이기때문에 잘 들여다보자.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쾌락과 반대로 에피쿠로스가 추구하는 쾌락은 ‘소극적 쾌락’이다. 소극적 쾌락은 고통을 당하지 않는 것, 번뇌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을 뜻한다. (cf. 적극적쾌락은 쾌락이 끝난 후 우리에게 고통을 가져다준다. 예를들어 맛있는 음식을 잔뜩 먹으면 먹을 때는 참 좋지만, 그 후에는 탈이나거나 불편한 상태가 된다.)
에피쿠로스의 아타락시아는 세속적 욕망을 멀리해 마음의 평정을 얻은 상태이다. 마음의 평온 상태야말로 오랫동안 행복을 보장할 수 있는 최상의 빙법.
(세상엔 적극적인 쾌락만을 추구하는 이들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에피쿠로스와 같은 이가 있었다는 것이 위로가 된다.)
아타락시아를 이루기 위한 방법은, 금욕과 은둔이다. 금욕과 은둔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적은 것에도 만족하는 것이 금욕, 사람들 속이 아닌 독립된 삶의 영역을 찾아가는 것이 은둔. 석가모니가 말했듯, 인간의 삶은 고통의 바다이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육체적 고통과 감정적 상처로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마음의 평안을 유지하는 아타락시아는 해법이 된다. 내가 참 좋아하는 단어, [중용]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아니하고 한쪽으로 치우치지도 아니한, 떳떳하며 변함이 없는 상태를 유지하자.
나의 중심 둘: 늘 작은 것에도 감사하며 금욕을 실천하고, 나만의 독립된 지속가능한 마음의 낙원을 찾아 은둔하여 아타락시아를 이루자.

Day+3 Zenon “Apatheia”

오늘의 철학자: 제논과 에픽테토스 (스토아학파, 고대철학자)
제논의 ‘아파테이아(apatheia)’
세상의 모든 것은 자연이라는 큰 세계의 부분들일 뿐이다.
개인의 삶도 자연과 조화를 유지할 때 행복해질 수 있다.
아파테이아는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마음의 초월 상태를 말한다.
“우리가 괴로운 것은, 감정 때문일까 이성 때문일까?”
감정이다. 감정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고, 괴롭힌다. 세상을 감정으로 파악하면 흔들리기 쉽다.
인간은 벌어진 일 때문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자신의 생각 때문에 고통받는다.
-에픽테토스
따라서, 인간은 이성을 잘 사용할 때 아파테이아에 도달 할 수 있다.
제논은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을 세가지로 아래와 같이 나누었다.
선한 것: 지혜, 용기, 절제
악한 것: 어리석음, 무절제, 불의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것: 부, 명성, 아름다움, 출신 ...
제논은 이때,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것’은 우리의 행복과 무관하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에픽테토스 역시 부, 지위, 건강등에 문제가 발생할 시 우리가 결정해야한다고 말했다
;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지를.
이성은 우리에게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가려내고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을 준다.
정념(=감정)에 좌우되지 말고, 이성의 명령에 따라서 산다면 아파테이아에 도달 할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구절,
God, give us grace to accept with serenity the things cannot be changed,
courage to change the things that should be changed, and the wisdom to distinguish the one from the other.
-Serenity Prayer
우리 스스로 내린 결단이 삶의 모습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기억하자.
나의 중심 셋: 나의 의지로 바꿀 수 없는 상황에 대해 정념을 쏟아 정신을 어지럽히지 말 것.
정념보다는 로고스, 이성을 바라며 살아갈 것.

Day+4 Descartes - 방법적 회의

오늘의 철학자: 데카르트 (근대철학자)
데카르트가 바란 것은 명확한 근본 지식이다.
이를 위해 가장 먼저 의심한 것은 우리의 ‘감각’이다.
감각은 변한다.
따라서 불완전하다.
Ex. 얼마 전 맛집에서 먹은 음식이 너무 맛있어서, 다음에 다시 찾아갔더니 맛이 변했다.
길을 가다가 누군가의 뒷모습을 보고 친구인 것 같아 달려갔는데 모르는 사람이었다.
이처럼 우리의 감각은 정확하지 않고 변하기도 한다.
그가 두번째로 의심한 것은 ‘이성적 지식’이다.
수학을 살펴보자.
1+1=2 라는 명제는 변함없고 확실하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이렇게 생각했다. 인간의 능력보다 뛰어난 어떤 존재에 의해 왜곡 될 수 있는것이라고 했다. 즉, 1+1=3일 수도 있는데 뛰어난 악령이 2가 답이라고 주입한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악령의 가설’에 의해 수학적 진리또한 보장되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결론을 내린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 Cogito ergo sum
그의 생각을 악령이 사악한 힘으로 속이고 환상을 심어주어도,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나 자신’이 존재해야한다.
이 명제의 진리는 너무나 확실해서 철학의 제 1원리라고 데카르트는 말한다.
나의 중심 넷: 회의하라. 나의 감각과 이성적 지식조차도 왜곡되어 있을 수 있으니 회의하며 생각하기를 멈추지 말자.

Day+5 Aristotle - 우리 현실 속의 이데아 ‘idea’

오늘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고대철학자)
진리의 세계인 이데아의 존재를 믿었던 플라톤과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
하지만 이데아가 어디에 위치하느냐에 대해서 둘의 의견을 달랐다.
플라톤은 이데아가 현실 너머에 존재하여, 우리의 감각으로는 도달 할 수 없는 것이라고한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가 우리의 현실 속에 존재한다고 믿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세상의 모든 것을 형상과 질료로 파악한다.
형상은 한 개체를 그것일 수 있게 하는 본질을 뜻하며,
질료는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개체’를 구성하는 물질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아레테는, 형상의 완성이다.
어떤 사물의 가장 완벽한 상태를 말한다.
그렇다면 현실 속 이데아에서 행복은 어떻게 느끼는 것일까.
사람이 행복하려면 아레테를 실현하기 위해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행복해지려면 지혜를 기르고, 훌륭한 태도를 갖추어 올바른 행동을 반복할 수 있어야한다.
무엇이 중요한지 알고, 그것을 위해 꾸준히 노력할 수 있는 습관을 갖는 것이 행복의 비결.
한 마리 제비가 왔다고 해서 봄이 온 것은 아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한 번의 행동으로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없다.
좋은 습관과 지혜로운 선택을 꾸준히 반복할 때 행복할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말
;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성’이 행복을 이루는 데 꼭 필요한 능력이라고 했으며,
이성을 통해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이라고 했다.
(그동안 행복은 감정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내가 꾸준하게 행복하지 못한걸까?
내가 느낀 것들은 ‘찰나의 기쁨’이었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행복 추구에서 강조한 것은, ‘중용’이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것에서 더 나아가, 때에 맞게 무엇이 바람직한지 선택하고 행동하는 것.
즉 , 중간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가장 잘 맞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나의 중심 다섯: 꾸준한 지혜로운 선택과 행동이 나의 행복을 지킨다. 중간이 아닌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는 지혜와 습관을 기를 것.

Day+6 Bacon - ‘4대 우상론’

오늘의 철학자: Francis Bacon (근대철학자)
베이컨은 사람들의 그릇된 판단은 선입견과 어리석음에 기초한다고 보았다.
모르면서도 아는 척하고, 틀렸으면서도 맞는 것으로 착각하며 살아가는 것이 마치 우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과 같다고 보았다.
첫번째 우상은 ‘종족의 우상’이다.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기에 오류를 범하기 쉽다.
예를들어 인간은 목적의식이 있기에, 이 세상 또한 목적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꽃이 피는 것에도 목적이 있고, 길가에 돌멩이도 나름의 목적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는 자기 생각에 갇혀 다른 것들을 추측하여 잘못된 신념이나 확신을 갖게 되는 오류를 초래한다.
두번째는 ‘동굴의 우상’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동굴을 갖고 있다. 이는 경험이 될수도 환경이 될 수도 있다.
자신이 처한 환경은 자신의 생각에 고스란히 영향을 끼친다.
예를 들어, 내가 읽는 책이 나의 생각에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말이다.
이는 주관적인 입장으로 인한 우상이 된다.
세번째는 ‘시장의 우상’이다.
시장은 인간 사이의 의사소통의 중심이다. 이곳에서 인간을 말을 통해 의사소통을 한다.
따라서 ,언어라는 것에 기만 당하기 쉽다.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말에 속아 없는 존재를 믿게 되는 것이다.
가령 아테네의 여신이라는 말이 있으니 실제 아테네의 여신이 있다고 믿는것이다 .
네번째는 ‘극장의 우상’이다. 인간은 역사를 통해서 사상, 종교, 예술등 유산들을 축적해왔다.
나약한 인간은 이를 사유하지않고, 곧이 곧대로 믿고 따르는 경향이 있다.
베이컨은 일반 사람들이 믿고 따르는 체계는 모두 무대의 연극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이 모든 우상들을 경계하기 위해서는 ‘귀납법’이 필요하다.
어떤 결론을 먼저 내려놓고 그것에 대해 검증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경험적 사실로부터 원리를 추론하는 것이다.
베이컨의 4대우상론과 귀납법은 기존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인간의 인식 오류를 인정하고 경험을 통해서 지식을 찾아갈 것을 권한다.
나의 중심 여섯:
중심은 좋은데, 고집은 싫다.
내가 믿어온 것들이 진리가 아닐 수 있으니, 고집을 경계하되
융통한 중심을 세워갈 것.

Day+7 Hobbes - Leviathan

오늘의 철학자: Thomas Hobbes (근대철학자)
인간은 모두를 두렵게 하는 ‘공통의 힘’이 없이 사는 동안에는 투쟁의 상태에 있으며, 그러한 투쟁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고 할 만하다.
경쟁심은 사람들로 하여금 무언가를 얻기 위해 타인을 침략하게 만들며, 자신감의 결여는 안전을 위해, 명예욕은 명성을 위해 타인을 침략하게 만든다.
인간은 자연 상태에서 빠져나올 가능성이 있는데, 그 가능성의 일부는 정념에 있고, 일부는 이성에 있다.
다수 사람의 평화와 공동의 방어를 위해 편리하다고 생각하는 대로 그들의 힘과 수단을 끝까지 사용할 수 있다. 칼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 계약은 단지 말에 불과하며 사람을 구속할 수 있는 아무런 힘도 갖지 못한다.
<리바이어던>
카오스인 자연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인간의 ‘이성’이 필요하다.
따라서, 자연적으로 부여받은 권리를 양도하여 평화와 사회적 안정을 얻는 사회계약을 맺게된다.
홉스는 국가에 개인들이 계약을 지켜낼 수 있도록 담보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부여한다.
홉스는 인간의 경쟁심과 자신감 부족, 명예욕과 같은 본성으로 인해 서로 남의 것을 빼앗아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가 된다고 이야기 한 바있다.
하지만 결국 이렇게 자연상태를 경험한 인간은 역설적으로 평화를 바라게 된다.
2020.11.30 동물의 숲에서

Day+8 Hume - 상상력의 작용

오늘의 철학자: David Hume (근대철학자)
흄은 사물의 존재와 인과율, 자아에 대한 신념, 도덕과 종교에 대한 믿음에 대해 분석한 후 우리가 가진 관념이 모두 상상력의 작용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들어가기에 앞서, 흄이 말한 인상과 관념의 개념을 짚고가자.
흄은 경험론자로서, 인간에게 현실의 다양한 경험이 쌓이면 지각이 된다고 했고, 이 지각은 곧 인상과 관념으로 구성된다고 했다.
이때 인상이란 구체적인 경험을 뜻하고, 관념이란 인상을 통한 기억이다.
예를들어, 고양이가 할퀴어 상처가 난 일은 인상, 이를 통해 ‘고양이의 발톱을 조심하자’가 관념이 된다.
우리는 세상에 사물들이 존재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흄은 우리가 감각하지 않는 동안에도 사물이 존재하는 것이 확실한가 물으며, 실재를 의심한다.
인간은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을 ‘존재한다’고 착각하며 살아간다.
사물의 존재에 대한 우리의 확신은 믿음일 뿐 사실이라고 볼 증거는 없다.
인간이 이러한 착각을 하는 이유는, 흄은 세가지로 나누었다.
1.
감각: 우리는 어떤 사물을 중단없이 감각할 수 없다. 영원히 나무를 만지고만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2.
이성: 우리의 지각은 경험을 통해 얻는 것이지, 이성적 추론으로 얻을 수 없다.
3.
상상력: 사물이 존재한다는 믿음은 우리의 상상력의 작용이다.
흄은 상상력과 마음의 습관에 의해 우리의 지식과 자아와 믿음이 형성 되었음을 경험론적으로 증명한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흄의 결론이 우리의 지식이 쓸모없다는 뜻이 아니다.
(절대적인 지식은 불가능하나, 상대적 지식만으로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나의 중심 일곱: 절대적인 앎은 불가능하다. 겸손하라. 내가 지각하고, 관념하는 것 모두 상상력과 마음의 습관이 작용한 것일 뿐이다. 모든 일을 무겁게 생각하여 매몰되지 말 것.

Day+9 Kant - 실천이성비판

오늘의 철학자: Immanuel Kant (근대철학자)
칸트는 독일 철학자로서, 경험론과 합리론을 종합한 철학자이다.
지식을 얻으려면 경험이 필요하고, 이성을 통해 이 경험을 정리해야 필연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선험적 종합판단’이 필요하다고 했다.
선험적 종합판단: 항상 옳으면서도, 지식을 생산하게 해주는 판단 (ex. 4+7=11)
칸트는 ‘나는 무엇을 인식할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행해야만 하는가’, ‘나는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 이 세가지 물음으로 철학을 전개해 나간다.
이를 각각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에서 풀어냈다.
그 중에서도 인간은 왜 선하게 살아가야하는가를 밝혀낸 <실천이성비판>을 보겠다.
우리는 매순간 선택의 상황에서 도덕적 물음에 직면하게된다.
그 순간 선택을 도와주는 것이 ‘실천이성’이다.
무엇이 선한 것인지 알려주는 것이 ‘실천이성’이고, 그것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선의지’이다.
선은 무조건 행해야하는 것이고, 이를 ‘정언명령’이라고 한다.
자연적 성향은 우리가 편한대로 살 것을 권한다. 하지만 인간은 스스로 선을 실천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칸트는 보았다. 이것이야 말로 인간을 선하게, 숭고하게 만드는 실천이라고 하였다.
의무와 책임을 다할 의지가 없다면 자유는 없다.
<실천이성비판>
자유로운 삶이란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이익 욕망에서 벗어나 도덕의 법칙을 따르는 것을 말한다.
칸트는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연구나 강의를 하고, 오후 1시에는 점심을 먹으며 토론을, 저녁에는 책을 읽다가 10시에 잠들었다. 약속을 어기는 일도, 반복되는 일상에 지치지도 않고, 평생을 독신으로 살면서도 외로움을 몰랐고, 친구들과 유쾌하게 지냈다.
(매일 5시 반에 일어나 출근하고, 반복되는 일상을 살며, 책을 읽다 저녁 10시에 자는 삶을 사는 나와 비슷하다^^,,,혼자서도 외롭지 않고 행복할 수 있는 법만 좀 배워서 칸트처럼 되어보자...)
말그대로 철학과 생활이 일치한, 순수이성과 실천이상, 판단력이 조화를 이룬 성숙한 인간이었다.
이러한 삶을 통해, 인간이 내면의 도덕적 명령에 철저히 따르면서도 기쁨과 행복을 만끽할 수 있는지 증명해보였다.
나의 중심 여덟: 내 마음속 정언명령을 따라 살도록, 실천이성에 귀를 기울이도록, 마음뿐 아니라 실천하는 선의지가 굳건하도록, 늘 깨어있는 정직하고 올바른 칸트와 같은 이를 가슴에 새기자.

Day+10 Hegel - 변증법의 기본법칙

오늘의 철학자: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근대철학자)
헤겔의 변증법에서 사물들은 별도로 독립된 것이 아니라, 서로 영향을 미치며 작용한다.
변증법은 세상이 움직이는 기본적인 법칙이 있다고 설명한다.
첫번째는,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의 법칙’이다.
낮과 밤, 여름과 겨울, 전쟁과 평화 ... 세상을 대립자의 쌍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는 필연적인 것이다.
한 사물에는 대립하는 두가지 요소가 담겨있다. 서로 배척하고 갈등하면서 투쟁하는 관계에 있지만, 사실 두 요소는 서로에게 의존하고 있다. 사물은 투쟁에 의해서 하나가 다른 하나를 극복하고 기존의 자기를 뛰어넘어 새로운 자기로 질적 변화를 이루어 낸다.
두번째는 ‘양질 전화의 법칙’이다. 이는 양적으로 변화가 축적되면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뜻한다.
물을 끓이면, 얼마동안 변화가 없다가 이내 100도에서 끓고 수증기가 되며 질적인 변화를 보인다.
세번째는 ‘부정의 부정의 법칙’이다. 사물은 부정의 부정을 거쳐 변한다. 변화는 한마디로 나를 부정하는 것이다. 과거의 나를 부정하기 때문에 새로운 내가 탄생할 수 있는 것. 부정의 반복을 통해 사물은 더 나은 상태로 나아간다. 오래되고 부정적인 것을 버리고 더 나은 것으로 가는 과정이 정반합이다.
나의 중심 아홉: 내 안에 모든 부정함의 반대에는 긍정이 있고(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의 법칙), 나의 습관과 마음가짐은 이내 질적인 변화를 이룰 것이며(양질 전화의 법칙), 나의 현재모습이 싫기 때문에 다른 내가 되고자 스스로를 부정한다면 난 곧 변화할 것이다(부정의 부정의 법칙). 지금 내가 싫다. 변화하자.

Day+11 Nietzche - 낙타, 사자, 그리고 아이

니체는 신을 죽였다.
니체는 신이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니체에게 신은 인간의 자기비하와 같았다. 불완전한 자신에 대한 혐오이고, 인간적 삶에 대한 부정이었다.
(종교는 내세에서 구원받는 것을 선으로 만들며, 순종과 근면을 선으로 규정하고, 진취와 적극, 창의를 악으로 규정한다)
도덕 또한 원래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 말하면서, 이는 특정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만들어낸 일종의 이데올로기라고 하였다. 마약이자 세뇌장치라고 했다. (충, 효, 예 같은 것이 그렇다)
그 결과, 데카르트가 말한 ‘나는 생각한다’는 니체에 이르러 ‘나는 주입받는다’로 바뀌게 된다.
자. 여기까지 나는 니체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선과 악을 규정하지 않고 방탕하게 살겠다는건가? 라고 생각했다.
니체는 이어, 자기 가치를 창조하는 삶을 위한 정신의 세 가지 변화에 대해 말했다.
낙타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강한 인내심으로 살아가는 정신을 상징한다. 우리는 낙타의 정신을 칭송하며 살아가지만 이내 낙타의 삶은 괴롭다는 것을 자각한다. 더는 의무감과 책임감으로 살고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사자의 용기가 필요하다.
‘그건 위험해’, ‘너는 안돼’, ‘가족들도 생각해야지’라고 가로막는 ‘용’의 목소리가 들린다.
광폭한 사자는 이 용을 죽이고, 자기 가치를 실현하게 된다.
니체에게 기존의 도덕은 모두 용이다.
낙타는 사자가 되고, 사자는 이내 아이가 된다.
아이는 기존의 도덕에 얽매이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그냥 한다. 아이에게 삶은 놀이이다.
도덕이 아닌 자기 욕망으로 춤을 춘다. 삶은 한바탕 놀이이다.
내가 좋아하는 니체의 명언:
나를 죽이지 못한 모든 시련은
나를 한층 더 강하게 만든다.
살아 있는 한,
나는 점점더 강해질 것이다.
-니체
니체는 평생 병에 시달렸지만, 그 누구보다 삶을 긍정하는 철학을 탄생시켰다.
니체의 말처럼 고통에는 쾌락과 동일한 분량의 지혜가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니체는 세계를 역동적인 변화로 본다는 점에서 헤라클레이토스와 관점이 같다.
우리의 삶은 매 순간 재탄생 한다.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 일년 후의 내 모습은 지금과 다르다.
한시도 머물러 있지 않고 새로운 나를 만들어간다. 거인들에 의해 찢겨 죽었지만, 술과 축제의 신으로 재탄생한 디오니소스처럼 말이다.
쉼 없이 생성하는 삶의 방식에 대한 지독한 인정, 지금의 자신을 극복하고 새로운 자신으로 끊임없이 나아가는 힘에의 의지가 디오니소스적 긍정이다.
인간은 자신과 다른 것을 무의식적으로 두려워한다. 즉,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는 기존의 것에 머무르기 위해 새로움을 거부하는 일종의 퇴행적인 행동이다.
니체는 모든 권위를 내려놓고, 생명 그 자체로 살아갈 것을 권고한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짐을 내려놓고, 홀가분함으로 춤추고 노래하며 삶을 즐기라고 한다.
이를 통해 내가 니체를 오해했음을 깨달았다. 고정되지 않은 사물이기에, 끊임없이 변화하며 디오니소스적 긍정을 추구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나의 중심 열: 낙타, 그리고 사자를 거쳐 아이가 되자. 삶을 즐기자. 나는 그 대단한 만물의 영장이 아니라 그냥 바다, 나무, 토끼, 돌멩이 같은 것. 새로움을 거부하지 말며 차이를 인정하고 다양한 삶을 추구하고 변화하는 내가 되자.

Day+12 Freud - 이드, 자아, 초자아

오늘의 철학자: Sigmund Freud (근대철학자)
프로이트는 오스트리아의 정신과 의사이며, 무의식의 개념을 통해 인간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게 하였다.
프로이트는 한 환자를 치료하는 과정을 통해 사람의 정신 안에는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영역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인간은 타고난 동물적 본능을 억누르고 자신의 요구가 관철될 수 있도록 수위를 조절하고 방법도 찾아간다. 이 사회화 과정에서 억압이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밖에 없는데, 이로 인해 무의식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한 단계 더 나아가 정신을 이드와 자아, 초자아로 구분하였다.
이드(id)는 쾌락원리에 따라 본능을 충족시키는 것이며, 이드에게 도덕과 사회 규범, 선과 악은 무의미하다.
자아(ego)는 즉각적인 욕구충족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충족을 지연시키거나 조절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초자아(super ego)는 이상적인 세계를 설정하고 그것을 완전하게 추구하려는 영역이다.
(초자아의 하위영역에는 ‘양심’이 감시 역할을 한다)
예를들어, 깊은 밤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할때,
이드는 막무가내로 건너려고 하고,
초자아는 신호가 바뀔때까지 기다려야한다고 훈계하고,
자아는 둘에게 ‘안전하게 건널 수 있는지 확인하고 건너라’고 하며 타협안을 제시한다.
데카르트가 말한 ‘생각하는 나’는 프로이트에게로 와서 ‘무의식에 지배되는 나’로 역전된다. 즉 ‘생각하는 나’가 ‘알지못하는 나’가 있으먀, 그것이 무의식 혹은 이드였던 것이다.
프로이트는 인간 에너지의 원천이 이드에 있다고 보았으며, ‘욕망을 무시하지 마라!’라는 메세지를 던졌다.

Day+13 Husserl - “Epoche”

오늘의 철학자: Edmund Husserl (현대철학자)
후설은 왜 인간이 배가 고플 떄와, 배가 부를 떄 생각이 다를 수 있는지 명확하게 밝히고자 했다.
인간이 만두가게 앞을 지나갈 때, 배가 고플때는 ‘맛있겠다’라는 생각을하고, 배가부를 때는 아무생각 없이 지나가는 것에 대해서 밝히고자 한 것이다.
우리의 일상은 대상을 파악하는 과정으로서, 매순간마다 만나는 대상에 대한 느낌을 갖게되는데, 이는 즉 ‘의식’이다.
우리는 자신이 보는 것, 경험한 것을 실재라고 믿지만 알고 보면 그것은 나의 관심사와 욕구에 의해서 파악된 것일 뿐이다. 나의 배고픈 욕구가 만두를 맛있어보인다로 느끼게 한것 처럼 말이다.
후설은 이러한 ‘주관적 판단’에 대해 아주 강하게 객관적으로 볼 것을 권고한다.
후설이 생각하는 진정한 객관성이란, 하나의 현상에 대해서 다르게 인식되고 의미가 부여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다. 이것을 그는 ‘판단중지’, 혹은 ‘사태 그 자체로’라는 말로 강조한다.
사태를 그 자체로 보려면 기존의 습관적 태도로 세상을 판단하는 것을 멈추어야 한다. 있다, 없다, 좋다, 나쁘다, 기쁘다, 슬프다 등 모든 입장에 대해서 판단을 중지해야하는데, 이를 ‘에포케(Epoche)’라고 한다.
판단중지를 통해 사물과 현상을 제대로 보자는 시도였다.
판단을 중지하면 어떤 대상에 대한 의미가 생기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 현상과 의식이 만나는 지점에서 상황을 살펴볼 수 있다. 후설은 이렇게 대상과 의식이 만나는 지점을 탐구했다.
우리의 의식은 대상을 만나서 어떤 의미를 형성한다. 의식이 사과를 보았을 때 ‘먹고싶다’는 의미가 형성된다. 이떄 우리의 의식을 노에시스Noesis, 대상을 힐레Hyle, 그리고 의식이 대상을 만나 형성된 의미를 노에마Noema라고 한다.
인간은 세계에 대한 다양한 노에마를 얻게되며, 의식작용이 복잡해진다.
의식이 대상을 만나 의미를 찾아내는 과정이 반복되고 그것이 시간을 통해 누적되면 자기만의 지평을 갖게됟다.
지평이 좁을수록 볼 수 있는 것이 적고, 넓으면 그만큼 의미를 많이 찾아낼 수 있다.
나의 중심 열하나: 나를 되돌아 보았을 떄, 극단적인 주관으로 늘 대상을 판단해왔다. 특히 요즘 세대들에 ‘손절’이라는 말이 쉽게 오가는 현상 또한 에포케가 부족함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내 주위를 판단할 때, 노에마를 쉽게 결정내리기 보다 ‘사태 그 자체로!’라는 슬로건을 가슴에 새기며 에포케를 실천하자. 늘 객관적으로 판단하며, 스스로의 지평을 넓혀나가자.

Day+14 Heidegger - ‘근본기분’

오늘의 철학자: Martin Heidegger (현대철학자)
하이데거에 따르면 인간의 실존 모습은 과거에 사로 잡히고, 미래를 염려하며 현재를 불안해 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불안을 ‘근본기분’이라고 말했다. 불안은 존재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근본적인 느낌을 주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불안과 같은 근본기분이 찾아오면 존재가 얼마나 경이로운지 알게 된다. 그 순간 우리는 내가 가진 것으로 나를 보지 않고, 존재 자체를 보게 된다. 모든 사물이 그 존재 자체로 아름다움과 가치를 지닌 경이로운 존재로 보이는 것이다.
밑바닥으로 추락하고 나면 오히려 홀가분해지기도 한다. 추락이 비본래적인 것들을 제거해주기 때문이다. 그 순간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어 경이를 경험하게 된다.
불안은 그 대상이 명확하지 않다. 존재 자체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존재는 무에서 시작된다.
존재자에게 불안은, 있음과 없음, 존재와 무가 만날 수 있는 통로이다. 그래서 ‘근본기분’이다.
인간은 사회가 만들어놓은 안전장치를 찾게 된다. 우상에 환호하고, 돈과 지위에 집착하면서 신을 통해 불안을 해소하려고한다. 현대 사회의 본질은 자신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 모든 존재자에 대한 지배력을 높이는 것이다. 그래야 안정과 번영을 보장 받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이를 ‘지배에의 의지’라고 칭했다. 그의 눈으로는, 인간이 그토록 자랑하던 이성마저도 지배를 위한 의지에 의해 철저히 활용되고 있는 상황이다.
학문도, 종교도 결국 다 이데올로기이다. 우리는 내면의 공허함을 상품으로 채우려고 하기도 한다. 최고급 승용차와 명품핸드백, 최신형 휴대폰에 대한 선호가 그 것을 잘 보여준다.
우리는 과학기술주의가 만든 환상에 빠져 스스로 세상을 만드는 주체라고 착각하지만, 우리는 지배에의 의지에 사로잡힌 객체이자 수단일 뿐이다.
따라서 세속적인 삶을 탈피하고, 존재 자체를 볼 수 있어야한다. 중요한 것은 순간이다. 존재의 낯선 물음 앞에서, 도피하지 않는 것.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을 기억할 것. 죽음을 떠올리면 숙연해진다. 그 숙연함이 현재를 소중한 것으로 만들고, 삶과 존재의 의미를 더욱 선명하게 해준다.

Day+free!

오늘의 철학자: jean-Paul Sartre (현대철학자)
프랑스의 사상가이자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사랑은 실패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즉, 사랑은 원초적 불능이라는 것이다.
남자가 사랑한 여자는 자유로운 여자의 모습이었는데,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게 되면 그 즉시 자유를 잃고 객체화 되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선택의 힘을 잃어버린 그녀는 무기력한 대상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사랑은 육체를 얻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영혼, 마음을 얻는 것인데 누군가를 사랑하는 순간 그의 영혼은 자유를 상실한다. 즉자가 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사물을 갖는 것이지 사랑을 얻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분명 아름다운게 맞지만, 안타까운 것은 대자존재인 인간에게는 실패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르트르의 철학은 보부아르와의 로맨스를 통해 느낄 수 있다.
두 사람은 계약 결혼을 했고, 그 계약에 두 번째 조항은 다음과 같다.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되, 상대방이 다른 사람과 우연히 사랑에 빠지는 것을 허락한다”
무슨 말도 안되는 개소리인가...싶지만 이는 최대한 상대방의 자유를 존중하여 아름다운 사랑으로 남고자 했음일 수 있다. 즉, 상대방을 즉자화 하지 않겠다, 자유롭고 주체적으로 사는 그 자체를 사랑하겠다는 의지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오늘 나의 중심: 음... 나는 늘 사랑을 하면 상대의 자유를 구속하고, 나의 자유마저도 상대에게 바치곤 했다. 사르트르의 사랑에대한 원초적 불능이라는 철학은 공감하지 않지만, 상대방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 정말 사랑인 것임은 인정한다. 좀 더 넓은 그릇으로 사랑을 받고, 또 주는 사람이 되자.

Day+Free! 노자-도가도비상도

오늘의 철학자: 노자 (동양철학자)
도가도비상도, ‘도라고 말할 수 있는 도는 항상 그러한 도가 아니다’
세상의 진리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내가 옳다는 생각,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 위험하다.
그래서 노자는 비워두라고 말한다. 비워두면 채워지고 비워진다.
새로운 것을 알게 되면 받아들였다가, 흘려보내야한다.
그래야 새로운 지식이 들어오고, 이런 반복된 과정을 통해 세상의 진리인 도에 이를 수 있다.
오늘 나의 중심: 채워라. 그리고 비워라. 옳다는 생각을 경계하고, 흘려보내라.

Day Free! 칸트의 두 가지 이성

칸트는 이성이 두 가지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객관적 이성과 주관적 이성이다.
객관적 이성은 사물을 파악하고 분석하고 개념으로 만들어 지식화하는 이성이라면,
주관적 이성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사물이나 사람을 이용하거나 자기 보조노가 강화를 위해 이성을 사용하는 도구적 이성이다.
객관적 이성은, 인간에게 지식과 과학의 발달을 가져다주고, 정의 평등 평화의 신념에 따라 합리적인 사회를 구성하도록 유도한다.
이성이라는 이름 아래, 제멋대로 하는 사람을 볼 수 있었다.
그의 이성은 도구적 이성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내가 추구해야하는 이성 역시도 객관적 이성이어야 할 것이다. 주관적 이성을 경계해야한다. 이로써는 여전히 감정에 함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