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분기별 회고를 진행하고 싶었으나, 어쩌다 보니 1분기를 훌쩍 지난 1과 1/3분기의 회고를 하게 되었다. 파주출판단지 안에 있는 한 카페의 얼음 푸는 소리와 나의 타자소리, 카페의 음악소리와 내 에어팟에서 나오는 ASMR 소리가 한 데 뒤섞인 가운데, 회고 시작.
보기좋게 실패하고 1월의 일에 대한 회고만 남겼다고 한다…
1월
#01. 일
1월 3일, 첫 출근을 했다. 첫 주에는 로고를 다듬고 명함을 만들었다. 기존 명함, 웹사이트, 소개자료에 사용된 로고들의 형태가 조금씩 달랐고, 로고의 ai 파일을 뜯어보니 불필요한 패스(path)가 많았다. 워드타입의 스템도 제각각이었고(나중에 알게된 사실인데, 대표님께서 폰트를 마구 발굴, 수집하신 후 그 중 3가지의 폰트를 혼용하셨다고 한다.) 원 하나랑 사각형 하나로 이루어진 단순한 심볼 역시 어딘가 불안정해보였다. 그리고 워드타입과 심볼 사이의 간격도 애매하게 떨어져 있었다. 앞으로 만드는 대부분의 작업물에 로고가 들어갈 텐데, 시간이 걸리더라도 납득할 수 있는 퀄리티의 로고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작업에 들어갔다.
먼저 글자들의 x-height와 같은 사이즈를 일정하게 맞추고, 곡률이 있는 문자들은 시각 보정을 해주었다. 작업 도중 골수 이과생인 나는 ‘정해진 각도만을 사용해서 타이포를 만들 수 있을까?’라는 호기심이 생겼다. 나아가 ‘유저들이 이렇게 균일한 수치를 적용했을 때, 시각적인 안정감을 느낄까?’에 대한 실험도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Q의 삐침 부분과 A의 각도, t의 잘려나가는 윗부분에 30도 60도, 혹은 35도 55도 등의 수치를 적용해 보았는데, 생각보다 글자 자체의 조형감이 많이 무너져(=황당하게 생겨서) 빠르게 포기했다. 그렇게 문자 하나하나를 새로 그리고, 간격을 손보기 시작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 때 계속 물리와 화학을 선택했던 나의 디자인 철학 중 하나는 개체들마다 고유의 에너지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원자들이 인력과 반발력이 평형을 이루는 지점에서 화학 결합이 이루어지듯, 심볼과 워드타입, 그리고 워드타입 사이의 글자들이 서로 끌어당기는 힘과 밀어내는 힘이 균형을 이루는 지점을 찾아 글자와 심볼을 배치하였다. 마지막으로 로고에 약간의 특별함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에 각도에 대한 미련이 더해져, Q의 삐침과 t의 상단을 동일한 각도로 깎아 두 부분에 자를 대고 선을 그었을 때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재밌는 트릭도 심어놓았다.
명함을 디자인하고 인쇄하는 과정에서 인쇄 방식과 잉크에 대한 이해도가 많이 올랐다. 그동안 문서 색상 모드를 CMYK로 해도 결국 화면상에는 RGB로 출력될 텐데, 정확히 뭐가 다른 건지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채로 작업을 해왔었다. 어차피 서로 치환되는 관계라면, 이를 구분하는 게 의미가 있나 싶기도 하였다. 이게 잘 와닿지 않았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인데, 첫 번째는 내 모니터의 성능이 그리 좋지 않아서 RGB와 CMYK의 차이를 크게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이미지나 복잡한 그래픽과 같이 여러가지 색이 한데 섞여 있어 절대치는 변했을지라도 상대치는 유지되어 그 차이를 쉽게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명함 작업은 우리 로고의 색(#0078fe)이 명확하게 드러나야 했고, 하필 저 색이 HSL 값으로 환산하면 S와 L 값이 거의 100에 육박하는 Hue 기준 1시 방향 컬러였기 때문에 CMYK로 절대 재현되지 않았다. 여기서도 색에 대해 꽤나 흥미로운 사실을 직접 체감할 수 있었다. 색의 3원색(Cyan, Magenta, Yellow)은 더할 수록 명도가 낮아진다. 우리 로고는 엄청난 고명도와 고채도를 자랑하는데, 명도를 높이기 위해 색을 빼다보면 색이 탁해지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팬톤 컬러 별색 인쇄의 개념에 대해서도 공부를 하고, 인쇄소 사장님들께 전화로 여쭤보기도 했다. 결국 테스트로 팬톤 컬러로 인쇄를 진행했는데, 색 자체는 신비롭고 예뻤으나 실제 원하던 색과는 동떨어진 색이 나와, 결국 비용 등을 고려해 CMYK로 인쇄를 하기로 했다. 웹사이트에서 색을 변환해 보기도 하고, 변환된 색에서 CMYK 값을 1씩 조절하며 열심히 조색을 해보았다. 인쇄할 일이 있으면, 지금도 새로운 조합으로 테스트를 해보는 중이다. 작업을 하며 알게 된 사실인데, Adobe 프로그램에서 RGB 값을 입력했을 때 자동으로 변환되는 CMYK 값과, 색상 변환 사이트에서 변환해주는 CMYK 값이랑 모두 조금씩 차이가 있다. 그리고 RGB를 CMYK로 변환할 때 완벽하게 일치되는 색상이 나오는 게 아니라, 최대한 비슷한 색상을 제안해 주는 것이었다.
2주 차부터는 본격적으로 TIPS 사업계획서 작업을 시작했다. 지금도 후회되는 것 중 하나가 이때 조금 더 비즈니스나 우리의 메시지에 대해 명확하게 이해한 상태에서 작업을 했었으면 하는 것이다. (입사 2주 차였는데, 과한 욕심이었나 싶기도 하다) 메시지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없다 보니, 예쁘기라도 하자는 마음에 디자인적인 디테일에 과할 정도로 신경을 많이 쓰게 되었다. 초반에는 내부 구성원들 간의 문제 정의에 대한 합의가 잘 안 이루어져 있었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지나 어느정도의 권한과 책임을 얻게 된다면, 문제의 정의에 좀 더 시간을 투자할 수 있는 시스템 혹은 문화를 만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