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17 W9 | 52주 차
2024-12-23 (월) ~ 2024-12-29 (일)
01. 한 해를 돌아보며
딱 일 년 전에 쓴 52주 차 회고 글을 읽어봤다. 지난해의 난 올해에 영업을 하면서 사업개발 커리어를 쌓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고 보니 올해 1분기에는 영업을 종종 다녔다. 회사로 들어오는 모든 문의전화를 받았고, 또 수도권에 있는 모텔들 몇 곳은 지하철을 타고 가 만나기도 했다. 1월 초에 처음에 갔던 곳에서는 너무 서툴러 건물주한테 거의 IR 피칭을 하다시피 말을 했다. 날이 따뜻해질 때 즈음에는 나름대로 고객의 세계에 다가갈 수 있게 되어, 몇천만 원짜리 설계 계약이나 수억 원대 시공 계약을 수주하기도 했다. 쉽지는 않은 시간이었다. 프로젝트를 수주한 이후에는 프로젝트를 관리했어야 했는데, 이때 다른 팀원들에게 클라이언트의 요구사항을 전달하고 중간에서 이를 조율하는 과정이 엄청난 복병이었다. 평소 관계가 좋았음에도 업무상 짐을 하나 지어주며 이것 좀 해주십쇼 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협조를 결국 얻지 못해 내가 직접 일을 하기도 했고, 그러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완전히 무너져내리기도 했다. 사람이 힘들어서 그렇게 울 수 있는지 처음 알았는데 그게 한 5월 정도였던 것 같다.
그맘때 즈음 팀에 마케팅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마케팅 전담 인력을 채용하고자 하는 새로운 방향이 잡혔다. 그렇게 6월 말에 마케터를 새롭게 채용했고, 나는 23년 5월부터 1년 남짓 이어왔던 마케팅 R&R을 내려놓았다. 하반기부터 경영기획이라는 새로운 롤로 팀에 기여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프로젝트의 전략과 방향성 수립을 위한 근거자료 수집과 자료 만들기, 사람들이 일을 더 잘할 수 있도록 돕거나 일하는 방식을 개선시켜가는 일을 해나갔다. 팀에 슬랙을 도입해서 프로젝트 히스토리 관리와 비동기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개선하고, 휴가 관리나 구매 요청, 리드건 공유 등 작지만 쌓이면 번거로운 업무들을 자동화한 게 기억에 남는다. 유독 아날로그 인간이 많은 팀이라 일부 반발과 우려가 있었는데, 20장짜리 PT를 만들어 발표하기도 하고 한 명씩 포섭해서 여론을 만들기도 하며 결국 도입에 성공했다. 한 조직이 일해오던 관성을 깨본 게, 즉 일하는 문화를 바꿔본 것이 참 의미있는 경험이었다.
날이 추워질 때 즈음, 프로젝트 단위의 전략기획을 더 잘하기 위해 파이썬을 쓰기 시작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1년 정도 이 일을 하며 깨달은 사실은, 중소형 숙박업 도메인에서 데이터의 질을 높이는 데에는 한계가 명확하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데이터의 양을 압도적으로 늘리거나, 처리하는 속도를 빠르게 해서 시간을 벌고, 그 시간에 내 사고모델의 질을 높이는 방법을 생각해볼 수 있었다. 프로그래밍을 접목하면 이 두 가지를 한 번에 처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막연하게 있었다. 그러던 중, 디지털 마케팅 강의 패키지에서 파이썬을 이용해서 html 데이터를 파싱하는 업무 자동화 챕터를 발견했고, 여기서 웹사이트로 파이썬을 구동할 수 있는 코랩이라는 사이트를 알게 되었다. 바로 지피티와 클로드한테 쪼르르 달려가 나의 계획을 설명했고, 그들은 나의 상황에 맞게 코드를 몇 줄 짜주었다. 몇 주 씨름한 결과 내가 그리도 귀찮아하던 업무의 일부가 쉬프트 엔터만 치면 20초도 안 돼서 처리되었다. 통계적 신뢰를 높이기 위해 필요하지만, 어떤 수를 써도 비효율적이라서 할 수 없었던 일들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엄청난 생각이 들었다. 잘하면 나를 프로그램으로 대체할 수 있겠구나, 나의 워크 플로우와 사고 모델을 복제해서 우리 팀원들한테 하나씩 붙여놔줄 수 있겠구나. 그렇게 12월 첫째 주 토요일, 무료 크레딧으로 애저 가상 서버를 한 대 사고, 커서에게 ‘먼저 이 코드에서 코랩 의존성을 제거해주라’는 프롬프트를 치며 본격적인 게임이 시작되었다. 그날 이후로 일하는 시간의 50% 정도를 개발에 쓰고 있다. 원래는 연말까지 완성하려 했는데, 만드는 과정에서 계속 새로운 가능성들이 보여서 완성이라는 건 없겠다는 깨달음을 얻고, 꾸준히 업데이트해나가는 방향으로 계획을 수정했다. 이번 개발 프로젝트는 나의 일 역사에서 흥미로움 탑3 안에 든다. 공부를 병행해서 커서 의존도를 하루에 정말 0.1% 씩이라도 낮추는 게 앞으로의 목표다.